야고보서 2:1~13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2 만일 너희가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때
3 너희가 아름 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가로되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도 가난한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 하는 형제들아 들을 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아니 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자를 괄시 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 된대로 내 이웃 사랑 하기를 내 몸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 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니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이가 또한 살인 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 하지 아니하여도 살인 하면 율법을 범한자가 되느니라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자 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서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 하느니라
우리나라가 산업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있었던 서구 문화의 유입은 이땅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삶의 여러 영역에서 변화를 초래하게 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현저한 영향이 오늘의 우리로 하여금 <목표 중심의 인생관>을 갖게하고<목표 중심적 사람됨>을 만들어 낸 것 입니다
그것이 결코 잘못 된것은 아니고 이런 인생의 전환이 전쟁의 비극을 극복하고 단기간의 한국의 문화 발전을 초래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결과 우리문화 그리고 동양문화가 오랜 세월 강조해온 <관계 중신적 사람 됨>을 소홀이 하게 된것은 안타까운 사실 입니다
우리 한국인은 어떤 일이 잘 되어 가고 있느냐는 것을 물을 때 <괜찮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우리말의 괜찮다는 어원에 대해선 두가지 설이 소개 됩니다
본래 '괜찮다'는 '괜하지않다'라는 말에서 유래 했다고 하는데 그뜻은 '공연하지않다'로 '원인이 없다'는 의미로 전해지기도하고 어떤이는 한문의 '관계치 않다'는 뜻에서 온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후자를 취한다면
그 말은 '관계치 않아도 되십니까?'라는 뜻으로 모든 것을 관계의 관점에서 보고자 했던 옛 문화의 흔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인은 지금도 모든것의 중심에 있는것이'관시'곧 '관계'라고 합니다
중동에서도 '와스따'문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와스따는 중간이라는 것으로 중간이 잘 연결이 되어야 모든것이 제대로 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의 문화는 단연 관계 중심의 문화를 지향합니다
예수님도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 입니까? 우리의 삶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로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마침 유대인 회당에 들어와 예배하고 가난한 이웃을 차별하는 한 케이스를 통해서 바른 인간관계의 교훈을 당시의 그리스도인에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성경적인 인간관계~ 어떻게 형성 되어야 하겠습니까?
1.먼저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본문의시작되는 1절에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본문은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할 전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강조 합니다
왜 우리가 이웃을 차별 하게 됩니까? 그것은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인간적 편견이나 선입견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리스도가 정말 우리의삶의 주인 생각의 주인이 되어 다스리신다면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인간 관계의 전제는 먼저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진정 주인 되신
그분의 인도와 그분의 관점으로 인간 관계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 관계 적용의 가장 좋은 출발점은 아마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것인가?'를 쓴 촬스 쉘돈의 제안이라고 생각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 할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출발하는것 입니다
옛날 유대인 회당에 는 '췌찬'이라는 특별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그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말 석에 앉아야 했던 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이런 전통은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도 승계되어 교회의 장로님 들이나 교회에 큰 헌금을 한 사람 들의 지정 석이 존재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가난한 한 평신도가 이런 자리에 앉고자 할때 당신이 안내 봉사를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쉘돈의 질문을 적용하면 될것입니다
'예수님 같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옛 청교도 시대에 유명한 청교도 장군 크롬웰 곁에 한 남루한 옷 차림의교인이 앉고자 했을때 장군의 경호원이 그를 제지하자 '그대로 나두게 이분이나 나나 다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일 뿐이라네' 크롬웰이야 말로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적 인간 관계를 시작하는 첫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그 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2 성경 최고의 법에 따라 이웃을 사랑해야 힙니다
본문에 성경적 인간 관계를 가르치던 야고보는 본문의 절정인 8절에서 주님이 교훈 하신 최고의 법을 언급합니다 8-9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한대로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정죄 하리라' 이어지는 말씀에서 야고보는 인간 차별의 죄는 살인죄나 간음죄와 마찬 가지로 범죄라고 말 합니다
우리가 비록 살인 죄를 범하지 않았어도 간음 죄를 범하지 않았어도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차별하고 있다면 그것은 꼭 같이 율법을 깨트린 범죄라는것 입니다
왜냐하면 이웃을 사랑 하라는 명은 최고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명을 지키지 못했다면 우리는 최고의 법을 깨트린 최고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웃의 정의 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잘 어울리는 사람들 나와 비숫한 공간에서 비숫한 직업을 갖고 비숫한 수준의 삶을 사는 사람을 이웃으로 인식하기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웃의 정의는 달랐습니다
저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 하십니다
대답이 무엇입니까?
여리고 길에서 상처 받고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우리의 이웃으로 인식할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선 구체적으로 가난한 사람 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사랑 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전하십니다 2절에 보니까 어느날 회당에 금가락지를 낀 사람이 입장 합니다
여기 금가락지가 복수로 되어 있는것을 보면 각 손가락마다 반지를 하나씩 끼운사람 그리고 아름다운옷-번쩍 번쩍 빛나는/아마도 밍크코트를 입은 사람이 입장하자 안내자는 그를 제일 좋은 좌석으로 인도 합니다
그러나 그다음 가난한 자가 입장하자 '자리가 마땅치 않으니 서 계십시오' 하던가 발등상의 말석으로 인도합니다 성경은 이런 사고를 4절에서 악한 생각의 판단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8절 이하에서 최고의 법을 깨트리는 범죄라고 말합니다 왜 이웃 사랑이 최고의 법일까요?
최고의 하나님이 명하신 가장 중요한 최고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문 말씀의 적용이 교회당 좌석안내로 끝날 수 없다고 생각 합니다
우리 시대의 가난한 사람 들이 겪는 가장 큰 차별과 고통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예컨데 요즈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통을 조사해 보면 1순위가 전/월세대란 입니다 이런 시대에 이웃사랑 실천이 무엇이겠습니까? 간단 합니다
다 주택 소유자들이 전 월세를 동결하고 인상제한 운동에 동참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부동산 투기(땅과 주택투기)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실 수요 목적으로만 구입하고 그리고 내 운영 가능한 자금으로 조금씩이라도 가난한 이웃을 섬기고
구제하는 일에 동참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 성경 최고의 법을 따라 가난한 이웃을 사랑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심판날에 필요한 긍휼로 이웃들을 대해야 합니다
본 문의 마지막 두구절(12-13)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 하느니라'무슨 말 입니까?
마지막 심판의 날-우리 인간 관계에 대하여 우리는 심판에 직면 할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이웃들에게 한 모든 말 모든 행위가 심판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동료 이웃들 에게 쏟아놓은 모든말 취한 모든행위에 대하여 낱낱이 심판된다는 말입니다 그 날 우리는 주님께 어떻게 말씀하게 될까요?
제발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긍휼이 여겨 달라고 호소 할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그날 심판 날 주께 호소할 긍휼을 미리 이땅에서 부터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내용이 아니던가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 하여 주옵시고'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이웃을 긍휼이 여기고 용서로 다가서는 것을 성경은 은혜의 관계라고 합니다
우리의 모든 인간 관계를 은혜로 시작하고 은혜로 결산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특히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이웃사랑 계명은 우리를 속박하는 계명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케 하는율법(12-자유의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독일 전범을 잡아 법정에 세우는 일에 헌신해온 한 유대인 지도자가 수 많은 유대인 학살의 주동자인 아히히만의 재판에 방청하러 갔습니다
그는 이 악한 사람이 정죄를 받고 사형언도를 받는 역사적 장면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낮에는 유대인 전범을 추적하고 밤이면 밤마다 유대인 전범들의 사진을 떠 올리며 괴로운 밤을 살던 사람 이었습니다 그는 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 그를 향한 불타는 저주와 증오심을 안고 법정의 방청석에 앉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눈앞에 불과 20미터 떨어진 정면에 앉아 있는 초라한 노인 그에게 내려질 언도를 기다리며 불안 과 공포에 떨고있는 한 평범한 노인의 얼굴을 대면한 순간 그가 그렇게 수많은 자기 동족을 가스실로 보낸 악인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평범한 자기와 다를것이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믿을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갑자기 그가 불쌍해 졌습니다 그의 이성은 그를 정죄하고 저주함이 마땅하다고 말하고있지만
더 깊은 곳에 있는 감성은 그가 의도 하지 않는 용서를 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그는 그 법정에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고 그날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전범들을 그의 꿈속에서 더 이상 만나지 않고 단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는 자유인이 되어 살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새 인간 관계는 새 삶을 선물 한것 입니다
이 선물을 주시는 분 십자가에서 용서를 가르쳐준 그분을 삶의주인 으로 받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 야고보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의 실수가 없는 자가 있습니까? (0) | 2011.09.13 |
---|---|
믿음이 살아 있습니까? (0) | 2011.09.05 |
가을에 기뻐 할 수 있는 사람 (0) | 2011.08.21 |
성장 하고 있습니까? (0) | 2011.08.19 |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까? (0) | 2011.08.19 |